이성휘 목사님(1889-1950년)은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평양에 있는 숭실 중학교와 숭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거쳐 명문 프린스턴 신학교를 수료하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헨노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성휘 목사는 서문밖 교회에 목회하고 모교였던 숭실 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수하다가 마침내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일을 했다.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민족 정신을 심어 주고 일제와 투쟁을 하던 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1938년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신학교가 폐교로 문을 닫은 지 7,8년이 지나 다시 신학교의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에는 공산 정부가 들어와 신학교를 운영하기가 어려웠다.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인준 목사님은 1947년 1월 17일 소련군 사령부 특무대에 연행되어 간 후로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때에 신학교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던 분이 이성휘 목사님이었다. 공산치하에서 목회자이면서 교수로서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의 중책을 맡아 목숨 걸고 봉직하다가 6.25 전쟁 중에 공산당에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목사님은 특별히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라는 찬송을 가장 많이 불렀다고 한다. 목사님의 모교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은 강당에 ’이성휘 박사 순교 기념패‘를 안치하였다.
이성휘 목사님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숭실 대학을 공부하고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목사님은 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는데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한 달 반이나 걸려서 미국에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좋았지만 날이 갈수록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런데 같이 가는 친구는 미국 땅이 가까울수록 더욱 생기가 나고 좋아하고 기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친구의 부모님이 일찍이 미국에 이민 가셨으며 아들에게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에 오면 더 공부할 수 있다고 하여 지금 자신만만하게 미국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는 미국에 가지만 그 동안 말로만 들었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불안하였다고 한다. 이성휘 목사님은 여기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것은 천국을 미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에 갈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죽음의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기쁨이 넘치고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없이 살다가 죽는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곳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 천국에 가고 안 가고는 지금 세상에서 결정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천국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결정이 된다. 지금 믿는 자들에게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이규환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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